뉴필로소퍼 Vol 9. 삶을 죽음에게 묻다 - 리뷰

2020. 4. 12. 22:58Personal Thoughts

삶을 죽음에게 묻다


읽기 전

나는 어떤 형태로든(애인, 친구, 가족) 내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자주 묻는 편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하고 뜬금없이 불편한 주제를 꺼낸다. 대부분이 당황하지만, 결국 덤덤하게 생각을 나눴던 사람들은 지금 내 곁에 있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도망갔던 사람들은 지금 내 곁에 없다.

 

본격적으로 죽음을 탐구하기 전에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고민해봤다.

 

우선, 개인적으로 어떤 어려움, 힘든 일, 고통을 겪게 되면 그것을 일상의 작은 것으로 만들고 싶다. '별 것 아닌 일'로 만들면 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여린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라 하겠다. 아픔을 억지로 끄집어 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내면 깊은 곳의 상처로 곪게 두지 않는다. 일상에서 편하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고 나면 정말 별 거 아닌 일이 되는 것이다. 죽음도, 특히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은 나에게 큰 아픔인가보다.

 

두 번째,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다. 이 세상 여행을 마친 나에게 당연하게 오는 것, 그리고 나보다 먼저 여행을 마칠,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말이다. 인간은 죽음을 은폐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처럼 일상적인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때 매번 무너지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마주할 때 우리는 모두 무너지고 만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본인마저 포기하는 인간을 볼 때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최근 코로나19로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팬데믹 선언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아픔과 공포에 노출 돼 있는 2020년 4월, 뉴필로소퍼에서 1월에 발간한 <vol.9 삶을 죽음에게 묻다>를 집어 들었다. 하필 이 시기에 이 주제에 대해 다시 철학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 감사하며, 리뷰를 남겨야겠다.


읽은 후

 

 "좋은 죽음" 이란 무엇인가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지 정의하기 정말 어렵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확고한 것은, 개인의 죽음이 좋은 죽음인지 나쁜 죽음인지는 제 3자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릴 때 친척 어르신의 장례식장이었는데, 어렴풋이 호상이라 하시던 어른들 모습이 기억 속에 있다. 나는 '왜 본인도 아닌 남이 호상이라고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책의 어느 부분에서 좋은 죽음이란 수명을 다 한 자연사, 나쁜 죽음이란 재해나 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는 구절을 봤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재해나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어도, 본인의 신념과 사랑에 최선을 다 해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아쉽지만 멋지게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소크라테스와 스토아학파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죽음을 대비하는 훈련이라고 일컬었다. 훌륭한 철학자는 살아가면서 육신과 영혼의 분리를 연습하며, 이렇게 연습하면 죽음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메멘토 모리'를 연습하라고 했다. 즉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라고 제안했다. 이 연습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상상하는 일도 포함된다. 메멘토 모리 하니까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어서 첨부.

 

<대사들> 한스 홀바인, 가운데 일그러진 해골이 메멘토 모리를 상징한다

 

결국 두 의견 모두,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의식하고 대비해야 된다는 점에서 맥락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스토아학파의 메멘토 모리를 보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옛날에 만났던 사람인데, 출근 할 때 혹은 데이트 하고 헤어질 때 지금이 이 사람을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고 했었다. (뭐, 사족이지만, 생사의 최접전에 있는 의료인이었어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다시 만났을 때 감사하고 소중함을 느낀다고 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 사람의 영향으로 나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이별은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는 거니까. 출근길에 부모님 두 분 얼굴을 꼭 보고 나가는 것도, 조부모님댁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점처럼 보일 때 까지 손을 흔드는 것도 생각해보니 그런 이유였다.

 

 오늘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수 블랙 

결국 오늘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떠나면 더는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수많은 두려움은 결국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소견으로는 사는 동안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다는 두려움도 있을 것 같다. 충분히 모험하지 않았을까봐, 충분히 웃지 못했을까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죽을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이 마감될 때 일어나는 끔찍한 무엇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성취한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생각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다.

 

더 말이 필요 없는 문구여서 인용했다.

 

 반성 

나는 한 노견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나이 든 개의 죽음과 견주가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커뮤니티에 오래 있었던 만큼 한 아이, 한 아이 모두 소중하기에 아이를 충분히 애도하고 보호자를 위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이를 소풍 보낸 보호자님께 자주 드리는 말이 있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나 겪는 것입니다. 저도 겪을 거구요. 결국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해요.' 이 매거진을 보고 이런 말을 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됐다.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허세를 부렸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철학자 팀 딘이 쓴 <죽음이라는 위대한 스승>을 읽고 특히 많이 반성했다. 팀 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방지게도 나는 죽음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철학을 충분히 내면화했다고 자신했다. 철학이 나를 무장시켰다고 오랫동안 믿었던 터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 . 하지만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죽음에 대해 배울 게 많다는 교훈을 얻었다.

 

좀 더 경건하게 애도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 

나중에, 나에게도 아픔이 찾아왔을 때, 그 때 다시 한 번 이 매거진을 보고싶다.

 

개인적으로 죽기 전에 자서전을 쓰고싶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상관 없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하고 싶다. 자서전에 대한 생각은 10대 때 부터 해왔었다. 내 자서전을 보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누군가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겠다. 초점은 한 올의 거짓말도 없이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을 남기고 쿨하게 떠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의 죽음이다. 

 

많이 생각했지만 아직도 정답을 내리지 못한, 앞으로도 내리지 못할 토픽인 것 같다. 절대 겪고싶지 않지만 어떻게든 겪을 수 밖에 없는 것,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또 너무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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